2013년 8월 일본의 이즈모함 진수식.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받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만들었던 길이 132m, 폭 21m의 장갑 순양함의 명칭과 똑같다.

동북아 바다가 또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열강의 해군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구한말을 연상시킨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거침없이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는 일본과 경제굴기에 이어 군사굴기를 노리는 중국, 옛 소련의 영광을 못잊는 러시아, 그리고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ㆍ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를 외치는 미국이 틈만 나면 우리의 주변 해역에서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동북아 강대국의 최신 군함 이름에서 구한말 제국주의 시대의 자취가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지난 5월 중ㆍ러 양국이 동중국해상에서 벌인 합동군사훈련 '해상협력-2014'에는 러시아의 최신 미사일 순양함인 바랴크호와 대잠 초계함 카레예츠호 등이 참가했다. 이들 군함은 1904년 러일전쟁에 참여했던 순양함과 포함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두 군함 모두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타고 있던 러시아 장병들은 일본의 항복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스스로 자폭해 수장되는 길을 택했다.

러시아는 이들 장병의 장렬한 투혼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구소련 때부터 역사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 사건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바랴크호를 기념하는 노래가 8개나 된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노량해전과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방한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짧은 체류 일정 속에서도 인천항에 설치된 바랴크함 추모비로 달려간 것은 이런 국민정서를 의식한 행보였던 셈이다.

바랴크라는 이름은 13억 중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구소련이 바랴크호의 이름을 기려 만든 항공모함 바랴크를 사들여 다롄조선소에서 10년 동안 손질한 끝에 2012년 9월 중국의 첫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호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중국의 항공모함 라오닝호. 1998년 우크라이나에서 미완성 항모 '바랴크'를 2000만 달러에 사들여 개조를 시작한 지 14년 만인 지난 2012년 진수했다.

중국도 러시아 바랴크호와 비슷한 패배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중국 정부는 최근 1894년 청일전쟁때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침몰됐던 북양함대의 철갑순양함 '즈위안(致遠)'함을 국민 성금으로 복원해 오는 9월부터 역사 교육용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 순양함은 덩스창(鄧世昌) 함장을 비롯한 장병 240여 명이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해군은 청일전쟁 120주년이었던 지난 25일 북양함대 기지였던 산둥성 웨이하이(威海)시 류궁다오(劉公島)에서 '갑오의 치욕을 가슴 속에 새기고, 강군의 꿈을 실천하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식을 가졌다.

반면 일본은 옛 군국주의 시대의 승전을 기억하는 도구로 군함 명칭을 활용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지난해 8월 항공모함급 헬기 호위함 '이즈모(出雲)'호를 진수했다. 일본은 시마네현 동부의 옛 명칭을 따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중국과 러시아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호위함의 이름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받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만들었던 길이 132m, 폭 21m의 장갑 순양함의 명칭과 똑같다. 순양함 이즈모는 러일전쟁 당시 제정 러시아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던 쓰시마 해전에서 활약했고, 1937년 중일전쟁 때는 상하이 앞바다에서 시내를 향해 집중 포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바 있다.

군함 이름을 통해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우리 해군도 마찬가지다. 지난 3일 1800톤급의 국내 최대 디젤 잠수함인 윤봉길함이 진수식을 가졌다. 최고 속력 20노트(37㎞)로 하와이까지 연료 재충전 없이 왕복 항해할 수 있고 수면에 올라오지 않고 2주간 수중에서 작전수행이 가능해 디젤 잠수함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해군은 2008년 6월 진수된 '안중근함'부터 신형 잠수함에 줄줄이 항일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앞으로 나올 잠수함들도 홍범도, 김구, 안창호, 유관순, 이봉창 등의 이름을 붙힐 계획이다.

동북아 각국의 군함 이름만 보면 역사의 시계바늘이 이미 100여년 전으로 되돌아간 착각이 들기 쉽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 비극만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난 7월 3일 진수식을 가진 국내 다섯번째 214급 최신예 잠수함 윤봉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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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레슬러의 義理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차장·정치부

 

2014년 1월 15일 안토니오 이노키가 평양에서 북한 김영일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와 환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

 

북한과 일본이 일본인 납치자 문제의 전면조사에 합의하면서 북·일 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북·일 양측은 지난달 26~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국장급 협의를 열어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전면 재조사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또 조사가 개시되는 시점에 일본이 취하고 있는 독자적 대북제재를 풀기로 했다.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면 국교 정상화 협상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한국과 미국으로서는 북핵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이 지나치게 북한 페이스에 말리는 것은 아닌지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프로레슬링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71)가 북·일 대화에 다리를 놓았다는 점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그동안 자신의 측근을 활용해 몇차례 북한과의 대화를 타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주요한 고비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등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면서 대화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꽉막힌 상황에 구멍을 뚫은 것이 이노키다. 그는 올 1월초 방북 일정을 마친 뒤 귀국하면서 “김영일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이 후루야 납치문제 담당상의 방북을 요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아베 정권은 당초 정부 차원의 공식 제안이 아니라며 일축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물밑에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일본 외무성은 1월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한 당국과 비밀 접촉을 시작해 4개월만에 스톡홀롬 합의까지 도출할 수 있었다.

이노키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신화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대표적인 친북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까지 총 29번 방북해 북한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2010년에는 북한으로부터 ‘제1급 친선훈장’까지 받았다. 국회의원이기도 한 그는 북·일 관계가 경색된 지난해 11월 의회의 불허 방침에도 방북을 강행해 등원 정지 30일의 징계까지 받았을 정도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존경하는 영웅이 왜 하필 북한에 못가 안달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이노키의 정치적 이념은 극우보수에 가깝다. 지난해 참의원선거에서 위안부 망언으로 유명한 하시모토 도루가 이끄는 일본유신회의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됐다. 최근에는 ‘원조극우’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주도하는 극우 신당에 참가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따라서 그의 친북활동은 정치 이념만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이노키 자신은 “일본의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스승인 역도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함경남도 출신의 역도산은 생전에 북한 정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962년 김일성에게 50세 생일 축하 선물로 벤츠 승용차를 보내는 등 북한에 상당한 기부를 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자신의 친족들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에서였다. 덕분에 그는 가장 자본주의적 스포츠중 하나인 프로레슬링 선수지만 북한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생애를 담은 소설과 TV드라마, 영화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노키는 역도산에 대해 신앙에 가까운 존경심을 갖고 있다. 역도산은 1960년 남미 순회 경기를 하던 중 일본계 이민자 가운데 유난히 체격이 큰 소년을 발견해 일본으로 데려와 선수로 데뷔시켰다. 그가 바로 이노키다. 이노키는 요즘도 “스승이 안 계셨으면 지금 내 자신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생전 역도산의 모습. 비행기에서 내린 역도산 뒤를 청년 이노키가 뒤따르고 있다.


이노키는 역도산이 40세 나이에 급사하자 그를 대신해 북한을 드나들며 스승의 피붙이들을 챙겼다. 그의 지속적인 후원 때문에 역도산의 사위 박명철과 여동생 2명은 북한에서 유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일본의 무혼(武魂)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에 가능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본 사회에서 매장됐을 지 모른다. 역도산의 제자이자 한국 레슬링의 영웅인 김일 선생이 말년에 생활고를 겪으며 어렵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잊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도 이노키였다. 190㎝, 115㎏의 늙은 레슬러가 민족도 이념도 경제논리도 초월해 진짜 ‘의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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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만주 하얼빈역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하는 등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군대를 사열하던 중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쓰러졌다.

이 사건을 놓고 105년이 흐른 지금 한ㆍ중 양국과 일본이 심각한 인식차를 드러내고 있다. 한ㆍ중 양국은 중국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개관하며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테러리스트'라고 맞서고 있다.

그런데 세 나라는 '항일영웅이냐 테러리스트냐'라는 논란에 매몰돼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이 격렬하게 충돌한 사건이다.

안 의사가 저격한 것은 이토라는 일제의 노(老) 정치인이 아니라 그로 대표되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안 의사의 용감한 총격 행위나 왼손 손가락을 잘라 쓴 혈서만을 기억할 뿐 그를 움직인 사상에는 무지하다.

그는 중국 뤼순 감옥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며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원래 계획은 전체 5장으로 구성하려 했으나 사형 집행이 당겨지면서 1, 2장만 남겼다. 안 의사는 이 책에서 19세기말 20세초 시기를 서양 주도의 '약육강식' 침략주의가 동양평화를 위태롭게하고 있는 시대라고 파악했다. 서양의 침략 위협에 맞서 동양 3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러일 전쟁은 그런 동양 3국 연대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일본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당시 조선과 청국 국민은 일본의 이런 명분을 믿고 일본군에게 운수ㆍ도로ㆍ철도건설ㆍ정탐 등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의 무대였기에 조선과 청국 국민의 이런 협력은 일본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안 의사는 믿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자 당초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조선의 국권을 찬탈했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은 조선인들은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안 의사가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이토를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그는 법정 심문과정에서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하는 길은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버리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독립한 한국ㆍ청국ㆍ일본의 동양 3국이 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해야 하며, 동양 3국이 서로 화합해 개화 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동양 3국의 구체적 협력 방법으로 내세운 제안은 지금봐도 놀랍다. 그는 한ㆍ중ㆍ일 3국이 '상설 평화회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으로 치면 유럽연합(EU) 같은 다자간 협의기구를 구성하자는 아이디어다. 그는 또 뤼순항의 개방과 공동관리, 3국 공동은행의 설립과 공용 화폐 발행, 3국 군단의 편성과 2개 국어 교육을 통한 평화군 양성, 공동 경제발전 등을 주창했다. 개별 민족국가 단위를 뛰어넘은 이런 지역 통합론은 유럽통합에 관한 사상들보다 3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이런 사상은 100년 이상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안 의사의 사상을 무시하고 그를 일개 테러리스트로 평가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쓴맛을 보고서도 아직도 옛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ㆍ중 양국에서도 일본의 과거사 역주행이 계속되자 그에 대한 맞대응으로 안 의사의 기념관을 세우기는 했지만 안 의사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안 의사의 하얼빈 총격만을 문제시하는 것은 달(동양평화)을 가리켰는데 손가락(총구)만 보고 있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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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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